김한구 (17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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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한구(1723년)는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1723년 충청도 홍주목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친분을 맺고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로 간택되면서 돈녕부도정, 지돈녕부사, 보국숭록대부 돈녕부영사, 오흥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금위대장, 어영대장 등을 역임했지만, 홍계희, 홍인한 등과 결탁하여 사도세자를 궁지로 몰아넣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묘소는 현재 남양주시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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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구 (172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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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한구 |
한자 이름 | 金漢耉 |
작위 |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
재임 | 1759년 6월~1769년 11월 5일 |
임금 | 영조 이금 |
직책2 | 조선의 어영청 어영대장 |
재임2 | 1763년~1764년 |
임금2 | 영조 이금 |
자 | 국로(國老) |
호 | 기졸재(寄拙齋) |
시호 | 충헌(忠憲) |
국적 | 조선 |
성별 | 남성 |
출생일 | 1723년 2월 23일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홍주목 서산군 음암면 유계리 한다리 마을 |
사망일 | 1769년 11월 5일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본관 | 경주(慶州) |
배우자 | 원주 원씨(原州 元氏) |
대리청정 | 세자 이선(1749~1762) 영상 신만(1762) |
가족 관계 | |
부 | 김선경(金選慶) |
모 | 남양 홍씨(南陽 洪氏) |
서모 | 순흥 안씨(順興 安氏) |
형제자매 | 김한기(동복 아우) 김한로(이복 서제) |
자녀 | 3남 2녀 (그 가운데 장남 김귀주, 차녀 정순왕후) |
친인척 | 원명직(장인) 영조 이금(막내 사위) 김두광(친갓댁 친할아버지) 홍주화(외갓댁 외할아버지) 김운경(친가 배다른 서백부) 김한록(친가친척 사촌 종형) 김한신(친가친척 8촌 삼종형) 화순옹주(친가친척 8촌 삼종형수) 김관주(친가친척 5촌 종조카) 김한귀(친가 방척 10촌 남동생) 김한룡(친가 방척 10촌 남동생) 김한봉(친가 방척 10촌 남동생) |
정치 성향 | |
당파 | 노론 |
2. 생애
김한구는 1723년 2월 23일 조선 충청도 홍주목 서산군 음암면 유계리의 한다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선경이고 어머니는 증 사헌부지평 홍주화(洪胄華)의 딸 남양 홍씨이다. 훗날 영조의 부마이자 화순옹주의 남편이 된 김한신은 김한구와 8촌 삼종형제지간이었다.[1]
김한구의 친척인 김흥경과 김한신은 한성에서 고관을 역임했지만, 김한구의 친가 집안은 충청도 서산군의 한다리 마을에 정착했고, 이후 인근에서 한다리 김씨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됐다.[1]
1758년 사마시 초시에 합격하고 복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1] 1759년(영조 35년) 6월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로 간택되자, 통정대부 돈녕부도정이 되고 자헌대부 지돈녕부사로 승진했다가 다시 그해 6월 11일 보국숭록대부 돈녕부영사로 특진하고 오흥부원군에 봉해졌다.[3] 그해 겸 오위도총부도총관과 상의원제조에 겸임되었다.
영조는 그에 대한 특별 배려로, 영조 자신의 명으로 철훼했던 성암서원을 복설시키기도 했다.[3] 충청도 서산의 성암서원은 김한구의 고조부 김홍욱이 배향된 서원이었다. 그해 금위대장, 1763년(영조 39) 어영대장을 지냈다. 그는 홍계희, 홍인한, 김상로 등과 결탁하여 사도세자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1764년 아들 김귀주가 왕과 친분이 있는 신하로서 노론의 당론에 관여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자, 아들을 잘못 가르쳤다고 하여 함께 파직되었다. 1766년 7월 영돈녕부사 겸 장악원제조로 복직되고, 1767년 다시 어영대장이 되었다.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가 죽자 영조는 경상도 관찰사였던 동생 김한기를 발탁하여 호조참판으로 삼았고, 그의 이종 사촌 이중호(李重祜)를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1]
2. 1. 초기 활동
김한구는 1723년 2월 23일 조선 충청도 홍주목 서산군 음암면 유계리의 한다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선경으로 백일장 향시에 합격한 후 음직으로 충청도 황간 현감과 공조 참의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증 사헌부지평 홍주화(洪胄華)의 딸 남양 홍씨이다. 훗날 영조의 부마이자 화순옹주의 남편이 된 김한신은 김한구와 8촌 삼종형제지간이었다.[1]김한구의 친척인 김흥경과 김한신은 한성에서 고관을 역임했지만, 김한구의 친가 집안은 충청도 서산군의 한다리 마을에 정착했고, 이후 인근에서 한다리 김씨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됐다.[1]
서산군 유계리에 전하는 민담에 따르면, 김한구의 부인 원주 원씨가 출산을 위해 강원도 원주 친정으로 가던 중 당진군 벌판길에서 첫 딸을 낳았는데, 이때 당진 관청 이사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사관은 의원을 불러 산모와 아기의 목숨을 구했다.[1]
자녀들이 태어난 뒤 김한구는 한성부로 상경하였는데, 당시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집을 자주 오가면서 홍봉한과 친분을 쌓았다. 홍봉한은 김한구의 글재주와 사람됨됨이를 보고 김한구 일가가 한성부로 이사와 살도록 도와주었다. 훗날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저서 한중록에서 양쪽 집안이 친하게 지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1]
1758년 사마시 초시에 합격하고 복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1]
2. 2. 정치 활동
1759년(영조 35년) 6월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로 간택되자, 통정대부 돈녕부도정(通政大夫 敦寧府都正)이 되고 자헌대부 지돈녕부사(資憲大夫 知敦寧府事)로 승진했다가 다시 그해 6월 11일 보국숭록대부 돈녕부영사(輔國崇祿大夫 敦寧府領事)로 특진하고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에 봉해졌다.[3] 그해 겸 오위도총부도총관과 상의원제조(尙衣院提調)에 겸임되었다.영조는 그에 대한 특별 배려로, 영조 자신의 명으로 철훼했던 성암서원을 복설시키기도 했다.[3] 충청도 서산의 성암서원은 김한구의 고조부 김홍욱이 배향된 서원이었다. 그해 금위대장, 1763년(영조 39) 어영대장을 지냈다. 그는 홍계희·홍인한·김상로 등과 결탁하여 사도세자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1764년 아들 김귀주가 왕과 친분이 있는 신하로서 노론의 당론에 관여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자, 아들을 잘못 가르쳤다고 하여 함께 파직되었다. 1766년 7월 영돈녕부사 겸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로 복직되고, 1767년 다시 어영대장이 되었다.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2. 3. 사후
그가 죽자 영조는 경상도 관찰사였던 동생 김한기를 발탁하여 호조참판으로 삼았고, 그의 이종 사촌 이중호(李重祜)를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1]그의 시신은 처음에 경기도 장단군 반룡산(盤龍山)에 안장되었다가, 1774년 5월 19일 아들 김귀주에 의해 양주시 금촌면 야동마산리(金村面 治東馬山里, 현 남양주시 이패동 산 43) 마산마을 간좌(艮坐)에 이장되었다.[1] 묘비석과 비문은 1770년 영조가 직접 지어 묘소 우측에 건립하였으며 비석 상단에 어필(御筆)이라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1] 묘표는 영조의 셋째 서녀 화평옹주의 남편 박명원이 지었는데, 박명원이 쓴 그의 묘표는 경기도 장단군에 있다.[1]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고조부 | 김홍욱 | 당진현감·홍주목사·충청도 관찰사 역임 |
고조모 | 동복 오씨 | 부: 오억령(이조참판), 조부: 오세현(영의정), 증조부: 오극권(이조판서) |
증조부 | 김계진 | 예원사평(隷院司評)‧동궁익위사세마(東宮翊衛司洗馬)‧지례현감(知禮縣監)‧황간현감(黃澗縣監) 역임 |
조부 | 김두광(金斗光) | |
아버지 | 김선경(金選慶, 1699년 ~ 1760년 9월 19일) | 호조 참의 역임 |
어머니 | 남양 홍씨 | |
본인 | 김한구(1723 ~ 1769) | |
부인 | 원풍부부인 원주 원씨(1716 ~ ?) | 원명직의 딸 |
장녀 | 경주 김씨(1738 ~ ?) | 상주 황사술(黃思述, 1722 ~ ? ; 진사 출신)의 측실 |
장남 | 김귀주(金龜柱, 1740 ~ 1786) | |
자부 | 이춘빈(李春彬)의 딸 | |
손자 | 김노충(金魯忠) | |
자부 | 박사경(朴師經)의 딸 | 김귀주의 후처 |
차남 | 김인주(金麟柱, 1742 ~ ?) | |
자부 | 홍치적(洪致績)의 딸 | |
차녀 | 정순왕후 김씨(1745 ~ 1805) | |
사위 | 영조 이금(1694 ~ 1776) | 조선 21대 국왕 |
사돈 | 숙종 이돈(1661 ~ 1720) | 조선 19대 국왕 |
동복 동생 | 김한기(金漢耆, 1728 ~ 1792) | |
서모 | 순흥 안씨 | 안중형(安重衡, 1695 ~ ?)의 딸 |
이복 동생 | 김한로(金漢老[4], 1746 ~ ?) |
4. 평가
김한구는 딸 정순왕후가 영조의 계비로 간택되면서 영조로부터 특별한 배려를 받았다. 영조는 김한구의 고조부 김홍욱이 배향된 서산의 성암서원을 복설시키기도 했다.[3]
4. 1. 부정적 평가
김한구는 홍계희, 홍인한, 김상로 등과 결탁하여 사도세자를 궁지로 몰아넣었다.[3] 1764년 아들 김귀주가 왕과 친분이 있는 신하로서 노론의 당론에 관여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파직당하자, 아들을 잘못 가르쳤다는 이유로 함께 파직되었다.5. 기타
그의 고조부 김홍욱의 형인 충민공 김홍익(1581 ~ 1636)의 4대손 중에도 김한구(1737 ~ ?)라는 동명이인이 있는데, 이쪽은 한자가 金漢龜(김한귀)로 10촌 동생뻘이 된다.[1]
6. 김한구가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백과사전
김한구
두산백과
[2]
서적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4
[3]
서적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2004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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